공지사항
.김해휴대폰성지"원래 비인기 종목 선수들은 다 이렇대요." 한국 산악스키Ski Mountaineering(줄여서 '스키모'라고도 한다) 국가대표팀의 정예지 선수가 지난 2월 4일 취재팀과의 인터뷰 중 체념한 듯 말했다. 그녀를 비롯한 5명의 선수들은 당시 '제9회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2월 7~14일)' 출전을 위해 맹훈련 중이었다. 설 명절에도 집에 가지 않았다. 출국이 코앞인데도 스키를 신었다. 그녀를 포함해 이날 모인 5명의 선수는 모두 진이 빠진 표정이었다. 여기서 정예지 선수의 "다 이렇다"는 말은 감독과 코치 없이 선수들끼리 훈련하는 것, 선수 전용 숙소가 아닌 개인이 계약한 '시즌방' 등지에서 머무는 것, 모든 식비와 교통비도 개인이 지불해야 한다는 것, 훈련장이 없어 이곳 저곳 기웃대며 서성이는 것 등을 가리킨다. 즉 국가를 대표하지만 정작 '국가'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고 '협회'의 대응 또한 차가운 상황을 일컫는다. 산악스키는 스키를 신고 산을 오르거나 걸은 뒤 활강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속도를 겨루는 스프린트, 혼성 계주 등으로 나뉜다. 2021년 7월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고, 내년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이 공식 첫 경기다. 금메달이 무려 5개나 걸려 있다. 이것은 산악스키가 세계적으로 꽤 인기가 있다는 방증이다. 한국 상황은 어떨까? 그와 정반대다. 선수가 얼마 없다.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우선 한국의 겨울은 짧다. 산악스키를 탈 수 있는 곳도 드물다. 스키장 슬로프를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방법이 있지만 스키장이 문을 열기 전, 새벽에 도둑처럼 올라야 한다. 이걸 그나마 허락해 주는 스키장도 용평리조트밖에 없다. 장비도 비싸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산악스키를 타려면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진입 장벽을 뚫어야 한다. 그 장벽을 뚫고 지난해 가을에 열린 산악스키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한 여자 선수는 고작 5명이었다. 정예지를 비롯한 산악스키 국가대표 선수들은 "다 이렇다"는 통설에 맞서거나 대꾸할 여유조차 없었다. 국가대표로 뽑혔는데 심하게 어려운 환경 탓을 하며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기왕 한 김에 해보자는 의지가 강했다고 봐야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의지는 보통의 강도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 각자가 국가대표 타이틀 뒤에 있을 뭔가를 노린다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고서 만만치 않은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국가대표가 됐을까? 선수 한 명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속마음을 들여다봤다. *산악스키 국가대표 6명 중 오영환 선수는 개인 스케줄 때문에 인터뷰에 참여하지 못했다. 정예지(35세, 넬슨스포츠 마케팅팀) 직장과 국대 훈련 병행…내가 좋아하니까 견딘다. 정예지 선수는 국가대표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이 두텁다. 산악스키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경력과 실력 면에서 국내 최상급이다. 이에 따라 이번 대회 때 국가대표 '주장' 역할을 소화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경기 출전을 위한 여러 행정절차를 처리했고, 그 와중에 훈련도 진행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번 시즌 그녀는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지냈다. 산악스키는 언제, 어떻게 접했나요? 20대 중반쯤일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스키를 너무 좋아해서 대학 입학 후 대학스키연맹 산하 스키부 활동도 하고, 스키장에서 강사로 일하기도 했어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알파인 스키 NTO(경기전문운영인력)로 일을 하기도 했고요. 당시 운영 스태프로 일하며 슬로프에서 선수들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이번 2025 아시안게임에서는 산악스키 종목의 국가대표 선수로 직접 경기에 참여하게 되어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준비하다가 산악스키라는 종목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산악스키협회'의 존재도 이때 처음 알았죠. 협회에 전화했더니 '정만' 이사가 "장비를 빌려줄 테니 와서 타보라"고 하기에 그걸 빌려서 새벽에 발왕산에 올라갔어요. 그때가 2017년인가? 그랬을 거예요. 슬로프를 처음 거슬러 올라갔을 때 힘들지 않았나요? 이전까지 스키를 타면서 땀을 흘린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슬로프를 거꾸로 올라가면서 땀을 엄청나게 쏟았어요. 너무 신기했어요. 트레일러닝을 하는 거랑 기분이 비슷했죠. 새로운 세계를 만난 것 같았어요. 산악스키를 대하는 마음이 그때와 지금이 똑같을까요? 마음은 같죠. 다만 지금은 현실에 좀 찌들었다고 할까요? 주변의 어떤 요소가 현실에 찌든 느낌을 주던가요? 산악스키나 트레일러닝만 해서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렵잖아요.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직장을 찾다가 지금 회사에 들어왔어요. 누구보다 회사 생활을 열심히 했어요. 하지만 일을 하다 보니 혼란스러웠어요.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서 직업적으로 성장을 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더 늦기 전에 선수생활에만 집중해야 할지 같은 고민을 했죠. 그 혼란의 결정타를 맞은 게 이번 아시안게임 준비일까요? 그렇긴 해요. 왜냐하면 아무리 아시안게임이라도 국가대표잖아요! 대충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직장을 그만둬야 할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보자고 마음먹었죠. 산악스키 선수로 활동한다고 돈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지금도 선수랑 직장인 사이 정체성 혼돈이 있지만, 좋은 선택이었어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사정을 많이 봐주는 편인가요? 네! 너무 많은 편의를 봐주고 있어요. 회사에서 출장으로 인정해 줬어요. 훈련을 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20일, 3주 정도 양해를 구했죠. 물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행히 이해해줬어요. 혼란함 속에서 그래도 앞으로 갈 수 있는 샛길을 찾은 것 같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