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김해 포장이사 현대적 의미의 선거 여론조사는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처음 등장했다. 민주공화당 소속 두 후보 앤드루 잭슨과 존 퀸시 애덤스가 맞붙은 선거였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의 한 지역 언론은 민심의 향방을 가늠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엽서를 발송한 뒤 답변을 취합하는 지상투표식 여론조사(straw poll)를 벌였고, 잭슨의 승리를 예측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반대였다. 답장을 준 주민들의 의사만으로는 여론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상투표식 여론조사 풍토는 1936년 미국 대선을 거치며 변화했다. 미국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잡지구독자, 유선전화 가입자 등 1000만 명에게 엽서를 보낸 뒤 236만 명으로부터 답변을 받고 알프레드 랜던 공화당 후보의 승리를 예측했다. 반면 한 신생 여론조사기관은 다양한 계층의 유권자 1500명을 대상으로 방문 면접조사를 실시한 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민주당 후보가 이길 거라고 내다봤다. 결과는 루스벨트의 승리.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200만 명이 넘는 표본을 가지고도 수치는커녕 결과 예측마저 실패했다. 반면 신생 여론조사기관은 1500명밖에 되지 않는 표본으로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해 선거 여론조사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그 업체가 바로 갤럽이다. 갤럽의 성공 이후 통계학 안에서만 머물던 표본 추출 방식이 여론조사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진짜 민심'을 알려면 모든 국민에게 일일이 의견을 물어야 하나 이는 물리적으로나 비용 측면에서 불가능하다. 전체 국민과 지역‧성‧연령대가 비슷한 비율로 표본을 꾸려 여론을 측정한 것이 최선이다. '지구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이라는 책처럼 표본이 국민 여론을 가늠하는 축소판이 되는 셈이다. 탄핵소추‧체포‧구속에도 尹 지지율 상승한 이유 한국에선 1987년 12월 16일 13대 대선을 기점으로 정치 여론조사가 본격화됐다. 이전엔 독재 정권 시절인 만큼 국민들이 의사를 밝히길 꺼렸고 과학적 여론조사에 대한 믿음도 부족했다. 13대 대선 땐 투표 종료 직후 공개되는 선거 예측 결과를 한국 언론들이 발표하지 않는 가운데 일본 NHK가 가장 먼저 대대적으로 발표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당시 한국 매체들은 개표 초반만 하더라도 "한국의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의 당선이 확정적"이라는 NHK의 보도에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여론조사는 시대 변화에 따라 한계를 드러냈다가 이내 보완되는 과정을 반복했다. 2000년대는 집 전화(유선전화)보다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람이 늘면서 예측 오류가 확대됐고, 2010년대엔 사전투표가 변수로 등장했다. 그때마다 여론조사는 구조적 변화를 꾀하며 지난 대선처럼 0.74%포인트 차이의 승패도 예측할 만큼 발전했다. 어느 정도 저명한 여론조사기관이라면 최소한 날림 공사하듯 여론조사하진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타당하다.